“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에서는 파괴 욕구가 일지 않냐?”
건축을 전공한 L과 사귈 때였다. 큰 맘먹고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는데, 내 방식대로 정돈한 책장의 책을 이리저리 옮겨 꽂으며 그러는 거다. 초록색으로 맞추어 놓은 칸 제일 위에 놓인 마돈나 자서전 위에 갈색 <논어>를 멋대로 올려놓으며 말이다.
자긴 무질서한 공간에 있을 때 상상의 여지가 있어 마음이 편하다며 L은 애써 정리한 남의 공간을 허락도 없이 어질렀다. 이런 남자를 위해 지난 삼일 간 속옷을 연어색 브라세트로 맞출까 아니면 블랙 레이스 끈팬티를 입을까 고민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남의 책장을 신나게 들쑤시는 남자를 지켜보는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 – 넌 오늘 밤 이후로 아웃. L은 자기가 차인 이유가 책꽂이 순서 때문이라고는 아마 꿈에도 모르리라.
물건이 어떤 자리에 어떻게 놓여있느냐는 내가 공간과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모든 건 에너지다. 내가 판단할 때 이상한 곳에 놓인 물건이 여기저기 있는 공간에 있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인테리어가 깔끔하다고 해서 기의 흐름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침대 머리맡과 창가만 제외하고 거울로 된 모텔 방에서 섹스를 한 적이 있다. 내 취향대로 모던하고, 무척 깔끔한 곳이었지만 사방이 거울, 특히 천장에도 거대한 거울이 붙어 있어서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을 때도 도통 섹스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피스톤 운동에 열중한 남자의 엉덩이를 그렇게 생생하게 보긴 처음이었다. 마치 지미집 카메라로 실시간 포르노를 보는 것 같아 시선이 계속 천장의 영상에 홀렸다. 급기야는 누워서 ‘팔을 이렇게 들어 올리니까 훨씬 날씬해 보이네’ 하고 이것저것 거울을 통해 자세를 점검하는 여유까지 부릴 정도였다.
침실은 침실로만 존재해야 한다. 침실이 따로 없는 원룸이라면 침대는 철저하게 ‘침대’로만 남겨두자. 책을 읽는 곳으로, 인터넷을 하는 곳으로, 간식을 먹는 곳으로 등등 보살펴야 할 것이 많은 침실에서 대단한 오르가슴을 기대하는 건 반칙이다.
경험 상 이 중에서 가장 나쁜 버릇은 음식을 침대에서 먹는 것이다. 헤드보드에 기대서 초콜릿을 먹다가 창가 옆에 개미떼가 한 줄로 줄지어 가는 것을 보고 기겁한 뒤로 침대에서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침대에서 휴대폰을 만지작하는 것도 삼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에 어떤 휴대폰은 변기의자보다 세균이 많다는 리서치 기사를 보고 눈물을 머금고 침대 아래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사실 이 모든 잡스러운 일을 침대에서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 몸이 피곤하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숙면을 위해 밤늦게 동네 한 바퀴를 뛰고 오는 건 상상만 해도 귀찮아. 몸을 기분 좋게 피곤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역시, 섹스다.